발 간 사
실무 능력을 겸한 다산의 행정사상
다산연구소를 출입하던 행정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다산의 행정사상’을 중심에 둔 학술 논저로 간행된다니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200여 년 전의 『목민심서』나 『경세유표』 및 『흠흠신서』를 새롭게 검토하고, 다산의 ‘논설집’에 나오는 정치·법·행정에 관한 제반 이론을 오늘의 행정사상에 접목시켜 다산학의 새로운 측면을 찾아낸 학자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 애초에 다산의 글은 순전히 한문으로 되어 있고, 번역본이라야 미비한 부분이 많은데, 그런 글이라도 꼼꼼히 읽어 이만한 연구 업적을 이룩해 낸 정성스러운 마음에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다.
옛날의 학문은 퇴영적이고, 고리타분하며, 비현실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상투적인 생각 때문에, 조선 시대의 고전이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기 마련인데, 외국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던 높은 수준의 학자들이 다산학에 관심을 갖고 200여 년 전의 고문서를 뒤적여, 값지고 귀한 다산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준 사실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75년의 일생에 어느 순간에도 백성과 나라에 대한 근심을 버리지 못하고, 18년의 외로운 유배생활이라는 고난의 세월에도 밤과 낮을 잊고 사색과 연구만을 거듭했던 다산의 깊은 뜻을 알아 주는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다산연구소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세월은 지나고 보아야 안다. 한국의 행정학계에도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병선·심준섭 교수의 ‘다산 행정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평가’ 부분을 읽으면서, 이제 다산이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빛을 보는 시대가 오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섬뜩 머리에 떠올랐다. 기존에 다산에 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다산 연구는 대체로 사회과학 계열에서보다는 인문과학, 즉 역사·철학·문학 등에서 주로 연구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다산학의 지평이 넓혀져 가는 일에 기쁨이 앞선다. 또한 이 연구에 다산연구소 관계자들의 번역서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 역시 연구소 관계자 모두에게 긍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 어려운 번역에 종사했지만, 별로 읽어 주는 사람이 없어 쓸쓸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았으나, 이만한 학자들이 이런 정도로 번역서를 가까이 해 준 점을 고맙게 여긴다.
다산은 인간이라면 먼저 사람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먼저 제 몸을 제대로 닦고 또 남들로 하여금 제대로 닦게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수기(修己)에 대한 해석으로 자신의 몸을 닦는 일도 되지만 남들이 자신의 몸을 닦도록 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다산은 수기의 근본이 효제(孝悌)에 있다고 믿고, 효제를 몸으로 실천하는 윤리적 인간이기를 강조했다. 육경사서(六經四書)라는 경(經)의 연구인 경학을 통해 자신도 수양하고 남들도 수양하기를 바랐고, 그것을 근본삼아 남과의 관계를 제대로 해내는 치인(治人)의 영역을 연구했으니, 세상을 경륜하는 경세학(經世學), 즉 일표이서(一表二書)라 할 수 있는 방대한 저서였다. 그래서 육경을 본(本)에 두고, 경세서인 『목민심서』등은 말(末)에 두어 본말이 구비될 때만 인간의 능사가 완료된다고 여겼다.
다산은 마음이 애국심에 있었기에, 아무도 시키거나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참으로 고단한 유배살이 동안, 정말로 치열하게 사색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500권이 넘는 실학의 대저를 남길 수 있었다. 다산은 애초에 경학 연구에 집중했다. 당시에 행세하던 관념적 경학 체계를 실행과 실천의 경학 이론으로 대체하지 않는 한, 어떤 경세 논리도 제 자리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경세학을 위해서라도 경학에 대한 천착을 미룰 수가 없었다. 위당 정인보는 말했다. “선생이 경학을 연구해 낸 뒤에야 경학과 정법(政法)의 둘로 나눠짐이 하나로 합해졌고, 잘못된 근거로 해석한 것들이 실증으로 돌아간 것이 사실”(??담원국학산고??의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선생?)이며, “선생의 경학은 곧 정법이다”라고 하여 경세학의 철학적 규명을 위해 경학을 연구했으니, 경학이 곧 정법인 경세학이요, 경세학의 근본이 경학이니, 경세학이 곧 경학이라 여겼다고 생각된다.
정인보가 사용한 정법(政法)은 바로 정치·경제·행정·법에 관한 종합적인 학문으로 여겼으니, 그래서 다산이야말로 조선 5백 년에 유일무이한 정법가(政法家)라고 감히 말했을 것이다. 정치가·법률가·행정가를 구분할 수 없었던 조선 시대는 군왕 한 사람이 그 모든 것을 겸해야 했고, 유능한 관료나 고관대작은 마땅히 세 분야에 밝은 사람이 아니면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이런 세 분야를 겸한 사람을 정법가로 여겼고, 그 중에서도 탁월한 정법가가 다산이었다는 것이 정인보의 주장이다.
행정사상만을 분리해서 이야기해 보면, 다산의 행정 논리는 행정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자는 주장이었다. 도덕성·전문성·개혁성을 두루 갖춘 군왕이 왕위에 있고, 군왕을 보필하는 고관대작이나, 백성들과 함께 현장에서 행정을 펴는 목민관들 또한 도덕성·전문성·개혁성을 갖추고 행정에 임해야만 부패와 착취의 사슬에 얽매인 백성들이 해방되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다산의 행정 원리였다. 행정가는 마땅히 철저한 도덕성으로 무장해 가장 양심적이고 청렴해야만 백성과 나라가 살아난다고 여겼다. 어떤 면에서도 전문성을 지녀야만 실무 능력을 갖춘 행정가가 될 수 있으며, 세상과 현실의 추이에 맞게 법과 제도를 개혁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개혁 마인드를 지닌 행정가만이 백성과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다산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부란(腐爛)한 세상이라 단정하고, 행정을 통해 깨끗하고 부패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그의 행정론에 제시된 학문의 목표였다. 그런 목표의 실현을 위해 경학을 새롭게 연구해 인간의 사유 체계를 바꾸고, 법제를 개혁해 새로운 나라로 바꾸고, 국부의 증진을 위해 기술의 도입과 개발을 위한 온갖 제도와 체제를 뜯어고치자고 주장했다. 이를 위한 추진력은 모두 국가의 행정력에 있기 때문에 물샐 틈 없는 법제의 정비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 연구서의 결론 부분을 읽으면서 이러한 다산의 뜻이 근접하게 정리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경세학 분야와 함께 다산의 경학까지 종합적으로 연구해 경학과 정법이 일치하고 있다는 정인보의 주장에 부응하는 논문이었다면 더 훌륭한 연구 결과가 아닐까 여겨 보지만, 그런 연구는 더 심화된 다음의 글에서 이룩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다산학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이 아니면서도, 오늘의 행정사상에 다산의 사유를 접목시키려고 노력한 학자들의 진지성에 경의를 표하며, 이런 연구 결과를 통해 부패와 타락에 찌든 오늘의 우리 사회가 더 깨끗하고 정직한 세상으로 바뀔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0년 5월
朴錫武(다산연구소 이사장)
머 리 말
학문 발전이나 과학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탐구나 이론의 출현은 필연적인 이유보다 우연한 기회나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우리의 다산에 대한 관심도 사실은 다산연구소가 2004년에 개설되면서 비롯됐다. 이 연구에 참가한 몇몇 연구자는 다산연구소 관계자들과 친밀한 사이였다. 다산연구소에서 우리에게 다산행정학의 연구를 종용했다. 다산의 중요 저술인 『목민심서』나 『경세유표』 등이 정부개혁에 관한 것이니, 행정학도들이 연구해 주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산행정연구모임이 시작되었다. 2004년 말 겨울부터 다산연구소의 세미나실에서 격주로 모임을 가졌다. 추운 지하실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당대의 다산학의 대가들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그 때 우리에게 강의를 해 주신 분은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김기엽(성균관대 교수), 임형택(성균관대 교수), 김상홍(단국대 교수), 이동환(고려대 교수), 송재소(성균관대 교수), 그리고 김태영(경희대 사학과 교수) 등이었다. 물론 다산연구소에서 그분들을 소개해 주었다. 대학 강의에 모시기도 어려운 분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미련한 행정학자들을 다산의 학맥으로 이끌고자 흔쾌히 시간을 내어 주셨다. 이 자리를 통해 그분들에게 제자의 마음으로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그분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우리가 다산의 정신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이 공동 연구를 하는 일은 혼자서 연구하는 것보다 장점이 많다. 우선 혼자서 연구를 하면 여러 가지 자잘한 핑계로 쉽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동 연구에서는 다른 동료들의 사회적 압력 때문에 꼭 해야 할 숙제를 미룰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다산행정 연구도 생각보다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었다. 그보다 더 분명한 장점은 연구 선배나 스승을 모시기가 아주 용이하다는 것이다. 혼자라면 감히 뵙자는 말씀을 올리기도 어려울 처지이지만, 여러 사람이 공동 연구를 한다면 모시는 정당성도 뚜렷하고 체면도 서는 일이다. 여기서 공동 연구의 장점을 마냥 늘어놓을 계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경험한 장점 하나는 빼놓을 수 없다. 공동 연구에서는 서로 토론을 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쉽게 빠질 수 있는 지적 함정에서 빠져나오도록 내미는 손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즐겁게 다산을 논구했다.
이렇게 진행하던 다산연구모임은 좀 더 과감한 도전을 시도했다. 2005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인문사회 기초연구과제로 응모해 선정된 것이다. 이 연구는 이후 3년간 적지 않은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조금은 여유로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 준 한국학술진흥재단에 감사드린다. 우리의 연구 결과는 2007년도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우수성과 연구과제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이 연구에는 김영평, 김성기, 채경석, 송하중, 최병선, 조성한, 최흥석, 문명재, 홍준현, 김태영(경희대 행정학과: 역사학과 김태영과 동명이인임), 심준섭, 진종순, 명성준, 김성현, 정재동(연령순) 등이 참가했고, 연구책임자는 홍준현이었다. 아울러 이 연구의 장래를 짊어질 젊은 학문 후속 세대로서 지루할 수도 있는 토론에 항상 동참하고 드러나지 않게 연구를 도와 준 조교는 조병훈, 김근식, 김민종, 김주경, 김지수, 박선주, 박지형, 유현지, 이보라, 임민혁, 정원희, 허성영 등이었다. 그들의 헌신적 동참에 치하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의 다산행정 연구는 단순히 고전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 연구에 참여한 대부분의 행정학자들은 다산의 원저인 한문을 읽지 못한다. 예컨대, 베버(Max Weber)를 연구하려면 필연적으로 독일어 원전이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영어 번역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의 관료제이론을 연구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다산행정 연구는 번역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 연구는 번역본의 부분적 오역 가능성에 얽매이지 않고, 다산의 개혁사상과 개혁 방향에서 오늘날 행정학으로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찾는 데 모아졌다. 때로는 다산이 직접 언급하지 않은 문제까지도 현대 행정학의 관점에서 교훈을 추출할 수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방대한 저술이나 시대를 앞선 개혁사상은 조선 시대를 대표할 만한 지성적 과업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다산 현상이라 할 만큼 다산콜센터, 다산부대, 다산목민대상 등 다산을 인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다산의 시문학적 업적이나 다산의 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한 분량의 연구 업적이 쌓여 있다. 행정학 분야에서도 100여 편의 연구 논문, 70여 편의 학위 논문, 그리고 10여 편의 단행본이 저술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단편적이고 탐색적이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우리가 이 연구에서 시도한 노력은 다산의 저술이 오늘날의 행정학에서 바라보면 “무슨 의미인가?”를 추적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것도 적지 않은 학자들이 주기적으로 만나 토론하면서, 서로의 관점을 수정해 통합된 시각을 마련하려고 애쓴 보람의 결실이다. 따라서 다산의 행정사상을 거시적 관점에서 그의 인간관에서 출발해 국가관과 사회관을 도출하려는 시도와 함께, 미시적 관점에서 조직관리와 리더십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각 분야의 개혁 방안에 대한 실용성까지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름대로 다산의 행정사상과 개혁 방안을 현대행정학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려는 집단적 노력이었다. 그만큼 학자 개인의 주관적 편견을 배제할 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알기로는, 다산에 대한 행정학 논의에서 공통적 시각을 견지한 공동 연구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이 연구는 장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거의 모든 내용이 한국행정학회 등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토론되어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쳤으며, 부분적으로는 연구의 내용들이 학술지에 발표되기도 했다. 이 내용은 따로 제시했다. 우리의 노력을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책으로 편집하기로 했으나, 일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다산의 행정사상』은 최병선과 심준섭이 그리고 『다산의 행정개혁』은 김영평과 홍준현이 편집의 책임을 맡기로 했다. 여기에 실린 모든 글에 책임 집필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으나, 우리들끼리의 수많은 토론과 논쟁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공동의 노력에 동참해 주신 동료 학자들께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이렇게 두 권의 책으로 내놓게 되고 보니, 우리 모두의 승리가 분명해 보인다. 끝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책의 출간을 기꺼이 수락해 주신 대영문화사의 임춘환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2010년 5월
『다산의 행정사상』과 『다산의 행정개혁』 편집인 일동
차 례
제1장 다산의 시대와 생애 정재동/17
1. 시대적 배경/18
2. 다산의 생애/21
제2장 인간관, 사회관, 국가관 최병선·조병훈/29
1. 서론/29
2. 다산이 그린 이상적 국가상과 법제도/32
3. 인간관/37
4. 사회관/43
5. 국가관/52
6. 해석과 평가/67
제3장 조직관 김성현/75
1. 서론/75
2. 주관과 객관 차원에서 다산의 조직관/77
3. 규제와 변동 차원에서 다산의 조직관/83
4. 해석과 평가/86
제4장 공직관 김성기/94
1. 서론/94
2. 다산 윤리의 기초/96
3. 다산의 공직관/113
4. 다산의 공직윤리/118
제5장 부정부패에 대한 인식 최병선·조병훈/129
1. 서론/129
2. 환곡의 문란과 부정부패의 양상/130
3. 원인 분석과 처방/145
4. 해석과 평가/163
제6장 리더십 문명재·김공록/174
1. 서론/174
2. 섬김의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175
3. 목민 리더십의 현대적 의미/179
4. 해석과 평가/196
제7장 의사결정론 심준섭/199
1. 서론/199
2. 조선의 사법 체계/201
3. 의사결정과 결정오차에 대한 다산의 사상/204
4. 해석과 평가/220
제8장 사회복지 이념 조성한/223
1. 서론/223
2. 조선 후기의 사회복지 상황/224
3. 다산의 복지 이념/227
4. 생산적 복지의 딜레마와 다산의 교훈/241
5. 해석과 평가/245
제9장 교육관 조성한/249
1. 서론/249
2. 교육철학/250
3. 교육제도와 교육 내용/258
4. 해석과 평가/265
제10장 다산 행정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평가 최병선·심준섭/267
1. 권력 중심의 현실주의적 세계관/270
2. 애민에 기초한 법제도 인식/276
3. 철두철미한 실적주의 공직관/284
4. 과학적 합리주의/289
5. 이 글을 마치며/293
용어 정리/297
찾아보기/309
발 간 사
실무 능력을 겸한 다산의 행정사상
다산연구소를 출입하던 행정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다산의 행정사상’을 중심에 둔 학술 논저로 간행된다니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200여 년 전의 『목민심서』나 『경세유표』 및 『흠흠신서』를 새롭게 검토하고, 다산의 ‘논설집’에 나오는 정치·법·행정에 관한 제반 이론을 오늘의 행정사상에 접목시켜 다산학의 새로운 측면을 찾아낸 학자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 애초에 다산의 글은 순전히 한문으로 되어 있고, 번역본이라야 미비한 부분이 많은데, 그런 글이라도 꼼꼼히 읽어 이만한 연구 업적을 이룩해 낸 정성스러운 마음에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다.
옛날의 학문은 퇴영적이고, 고리타분하며, 비현실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상투적인 생각 때문에, 조선 시대의 고전이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기 마련인데, 외국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던 높은 수준의 학자들이 다산학에 관심을 갖고 200여 년 전의 고문서를 뒤적여, 값지고 귀한 다산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준 사실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75년의 일생에 어느 순간에도 백성과 나라에 대한 근심을 버리지 못하고, 18년의 외로운 유배생활이라는 고난의 세월에도 밤과 낮을 잊고 사색과 연구만을 거듭했던 다산의 깊은 뜻을 알아 주는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다산연구소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세월은 지나고 보아야 안다. 한국의 행정학계에도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병선·심준섭 교수의 ‘다산 행정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평가’ 부분을 읽으면서, 이제 다산이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빛을 보는 시대가 오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섬뜩 머리에 떠올랐다. 기존에 다산에 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다산 연구는 대체로 사회과학 계열에서보다는 인문과학, 즉 역사·철학·문학 등에서 주로 연구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다산학의 지평이 넓혀져 가는 일에 기쁨이 앞선다. 또한 이 연구에 다산연구소 관계자들의 번역서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 역시 연구소 관계자 모두에게 긍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 어려운 번역에 종사했지만, 별로 읽어 주는 사람이 없어 쓸쓸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았으나, 이만한 학자들이 이런 정도로 번역서를 가까이 해 준 점을 고맙게 여긴다.
다산은 인간이라면 먼저 사람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먼저 제 몸을 제대로 닦고 또 남들로 하여금 제대로 닦게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수기(修己)에 대한 해석으로 자신의 몸을 닦는 일도 되지만 남들이 자신의 몸을 닦도록 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다산은 수기의 근본이 효제(孝悌)에 있다고 믿고, 효제를 몸으로 실천하는 윤리적 인간이기를 강조했다. 육경사서(六經四書)라는 경(經)의 연구인 경학을 통해 자신도 수양하고 남들도 수양하기를 바랐고, 그것을 근본삼아 남과의 관계를 제대로 해내는 치인(治人)의 영역을 연구했으니, 세상을 경륜하는 경세학(經世學), 즉 일표이서(一表二書)라 할 수 있는 방대한 저서였다. 그래서 육경을 본(本)에 두고, 경세서인 『목민심서』등은 말(末)에 두어 본말이 구비될 때만 인간의 능사가 완료된다고 여겼다.
다산은 마음이 애국심에 있었기에, 아무도 시키거나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참으로 고단한 유배살이 동안, 정말로 치열하게 사색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500권이 넘는 실학의 대저를 남길 수 있었다. 다산은 애초에 경학 연구에 집중했다. 당시에 행세하던 관념적 경학 체계를 실행과 실천의 경학 이론으로 대체하지 않는 한, 어떤 경세 논리도 제 자리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경세학을 위해서라도 경학에 대한 천착을 미룰 수가 없었다. 위당 정인보는 말했다. “선생이 경학을 연구해 낸 뒤에야 경학과 정법(政法)의 둘로 나눠짐이 하나로 합해졌고, 잘못된 근거로 해석한 것들이 실증으로 돌아간 것이 사실”(??담원국학산고??의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선생?)이며, “선생의 경학은 곧 정법이다”라고 하여 경세학의 철학적 규명을 위해 경학을 연구했으니, 경학이 곧 정법인 경세학이요, 경세학의 근본이 경학이니, 경세학이 곧 경학이라 여겼다고 생각된다.
정인보가 사용한 정법(政法)은 바로 정치·경제·행정·법에 관한 종합적인 학문으로 여겼으니, 그래서 다산이야말로 조선 5백 년에 유일무이한 정법가(政法家)라고 감히 말했을 것이다. 정치가·법률가·행정가를 구분할 수 없었던 조선 시대는 군왕 한 사람이 그 모든 것을 겸해야 했고, 유능한 관료나 고관대작은 마땅히 세 분야에 밝은 사람이 아니면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이런 세 분야를 겸한 사람을 정법가로 여겼고, 그 중에서도 탁월한 정법가가 다산이었다는 것이 정인보의 주장이다.
행정사상만을 분리해서 이야기해 보면, 다산의 행정 논리는 행정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자는 주장이었다. 도덕성·전문성·개혁성을 두루 갖춘 군왕이 왕위에 있고, 군왕을 보필하는 고관대작이나, 백성들과 함께 현장에서 행정을 펴는 목민관들 또한 도덕성·전문성·개혁성을 갖추고 행정에 임해야만 부패와 착취의 사슬에 얽매인 백성들이 해방되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다산의 행정 원리였다. 행정가는 마땅히 철저한 도덕성으로 무장해 가장 양심적이고 청렴해야만 백성과 나라가 살아난다고 여겼다. 어떤 면에서도 전문성을 지녀야만 실무 능력을 갖춘 행정가가 될 수 있으며, 세상과 현실의 추이에 맞게 법과 제도를 개혁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개혁 마인드를 지닌 행정가만이 백성과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다산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부란(腐爛)한 세상이라 단정하고, 행정을 통해 깨끗하고 부패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그의 행정론에 제시된 학문의 목표였다. 그런 목표의 실현을 위해 경학을 새롭게 연구해 인간의 사유 체계를 바꾸고, 법제를 개혁해 새로운 나라로 바꾸고, 국부의 증진을 위해 기술의 도입과 개발을 위한 온갖 제도와 체제를 뜯어고치자고 주장했다. 이를 위한 추진력은 모두 국가의 행정력에 있기 때문에 물샐 틈 없는 법제의 정비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 연구서의 결론 부분을 읽으면서 이러한 다산의 뜻이 근접하게 정리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경세학 분야와 함께 다산의 경학까지 종합적으로 연구해 경학과 정법이 일치하고 있다는 정인보의 주장에 부응하는 논문이었다면 더 훌륭한 연구 결과가 아닐까 여겨 보지만, 그런 연구는 더 심화된 다음의 글에서 이룩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다산학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이 아니면서도, 오늘의 행정사상에 다산의 사유를 접목시키려고 노력한 학자들의 진지성에 경의를 표하며, 이런 연구 결과를 통해 부패와 타락에 찌든 오늘의 우리 사회가 더 깨끗하고 정직한 세상으로 바뀔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0년 5월
朴錫武(다산연구소 이사장)
머 리 말
학문 발전이나 과학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탐구나 이론의 출현은 필연적인 이유보다 우연한 기회나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우리의 다산에 대한 관심도 사실은 다산연구소가 2004년에 개설되면서 비롯됐다. 이 연구에 참가한 몇몇 연구자는 다산연구소 관계자들과 친밀한 사이였다. 다산연구소에서 우리에게 다산행정학의 연구를 종용했다. 다산의 중요 저술인 『목민심서』나 『경세유표』 등이 정부개혁에 관한 것이니, 행정학도들이 연구해 주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산행정연구모임이 시작되었다. 2004년 말 겨울부터 다산연구소의 세미나실에서 격주로 모임을 가졌다. 추운 지하실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당대의 다산학의 대가들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그 때 우리에게 강의를 해 주신 분은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김기엽(성균관대 교수), 임형택(성균관대 교수), 김상홍(단국대 교수), 이동환(고려대 교수), 송재소(성균관대 교수), 그리고 김태영(경희대 사학과 교수) 등이었다. 물론 다산연구소에서 그분들을 소개해 주었다. 대학 강의에 모시기도 어려운 분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미련한 행정학자들을 다산의 학맥으로 이끌고자 흔쾌히 시간을 내어 주셨다. 이 자리를 통해 그분들에게 제자의 마음으로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그분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우리가 다산의 정신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이 공동 연구를 하는 일은 혼자서 연구하는 것보다 장점이 많다. 우선 혼자서 연구를 하면 여러 가지 자잘한 핑계로 쉽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동 연구에서는 다른 동료들의 사회적 압력 때문에 꼭 해야 할 숙제를 미룰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다산행정 연구도 생각보다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었다. 그보다 더 분명한 장점은 연구 선배나 스승을 모시기가 아주 용이하다는 것이다. 혼자라면 감히 뵙자는 말씀을 올리기도 어려울 처지이지만, 여러 사람이 공동 연구를 한다면 모시는 정당성도 뚜렷하고 체면도 서는 일이다. 여기서 공동 연구의 장점을 마냥 늘어놓을 계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경험한 장점 하나는 빼놓을 수 없다. 공동 연구에서는 서로 토론을 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쉽게 빠질 수 있는 지적 함정에서 빠져나오도록 내미는 손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즐겁게 다산을 논구했다.
이렇게 진행하던 다산연구모임은 좀 더 과감한 도전을 시도했다. 2005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인문사회 기초연구과제로 응모해 선정된 것이다. 이 연구는 이후 3년간 적지 않은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조금은 여유로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 준 한국학술진흥재단에 감사드린다. 우리의 연구 결과는 2007년도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우수성과 연구과제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이 연구에는 김영평, 김성기, 채경석, 송하중, 최병선, 조성한, 최흥석, 문명재, 홍준현, 김태영(경희대 행정학과: 역사학과 김태영과 동명이인임), 심준섭, 진종순, 명성준, 김성현, 정재동(연령순) 등이 참가했고, 연구책임자는 홍준현이었다. 아울러 이 연구의 장래를 짊어질 젊은 학문 후속 세대로서 지루할 수도 있는 토론에 항상 동참하고 드러나지 않게 연구를 도와 준 조교는 조병훈, 김근식, 김민종, 김주경, 김지수, 박선주, 박지형, 유현지, 이보라, 임민혁, 정원희, 허성영 등이었다. 그들의 헌신적 동참에 치하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의 다산행정 연구는 단순히 고전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 연구에 참여한 대부분의 행정학자들은 다산의 원저인 한문을 읽지 못한다. 예컨대, 베버(Max Weber)를 연구하려면 필연적으로 독일어 원전이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영어 번역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의 관료제이론을 연구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다산행정 연구는 번역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 연구는 번역본의 부분적 오역 가능성에 얽매이지 않고, 다산의 개혁사상과 개혁 방향에서 오늘날 행정학으로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찾는 데 모아졌다. 때로는 다산이 직접 언급하지 않은 문제까지도 현대 행정학의 관점에서 교훈을 추출할 수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방대한 저술이나 시대를 앞선 개혁사상은 조선 시대를 대표할 만한 지성적 과업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다산 현상이라 할 만큼 다산콜센터, 다산부대, 다산목민대상 등 다산을 인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다산의 시문학적 업적이나 다산의 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한 분량의 연구 업적이 쌓여 있다. 행정학 분야에서도 100여 편의 연구 논문, 70여 편의 학위 논문, 그리고 10여 편의 단행본이 저술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단편적이고 탐색적이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우리가 이 연구에서 시도한 노력은 다산의 저술이 오늘날의 행정학에서 바라보면 “무슨 의미인가?”를 추적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것도 적지 않은 학자들이 주기적으로 만나 토론하면서, 서로의 관점을 수정해 통합된 시각을 마련하려고 애쓴 보람의 결실이다. 따라서 다산의 행정사상을 거시적 관점에서 그의 인간관에서 출발해 국가관과 사회관을 도출하려는 시도와 함께, 미시적 관점에서 조직관리와 리더십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각 분야의 개혁 방안에 대한 실용성까지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름대로 다산의 행정사상과 개혁 방안을 현대행정학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려는 집단적 노력이었다. 그만큼 학자 개인의 주관적 편견을 배제할 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알기로는, 다산에 대한 행정학 논의에서 공통적 시각을 견지한 공동 연구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이 연구는 장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거의 모든 내용이 한국행정학회 등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토론되어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쳤으며, 부분적으로는 연구의 내용들이 학술지에 발표되기도 했다. 이 내용은 따로 제시했다. 우리의 노력을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책으로 편집하기로 했으나, 일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다산의 행정사상』은 최병선과 심준섭이 그리고 『다산의 행정개혁』은 김영평과 홍준현이 편집의 책임을 맡기로 했다. 여기에 실린 모든 글에 책임 집필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으나, 우리들끼리의 수많은 토론과 논쟁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공동의 노력에 동참해 주신 동료 학자들께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이렇게 두 권의 책으로 내놓게 되고 보니, 우리 모두의 승리가 분명해 보인다. 끝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책의 출간을 기꺼이 수락해 주신 대영문화사의 임춘환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2010년 5월
『다산의 행정사상』과 『다산의 행정개혁』 편집인 일동
차 례
제1장 다산의 시대와 생애 정재동/17
1. 시대적 배경/18
2. 다산의 생애/21
제2장 인간관, 사회관, 국가관 최병선·조병훈/29
1. 서론/29
2. 다산이 그린 이상적 국가상과 법제도/32
3. 인간관/37
4. 사회관/43
5. 국가관/52
6. 해석과 평가/67
제3장 조직관 김성현/75
1. 서론/75
2. 주관과 객관 차원에서 다산의 조직관/77
3. 규제와 변동 차원에서 다산의 조직관/83
4. 해석과 평가/86
제4장 공직관 김성기/94
1. 서론/94
2. 다산 윤리의 기초/96
3. 다산의 공직관/113
4. 다산의 공직윤리/118
제5장 부정부패에 대한 인식 최병선·조병훈/129
1. 서론/129
2. 환곡의 문란과 부정부패의 양상/130
3. 원인 분석과 처방/145
4. 해석과 평가/163
제6장 리더십 문명재·김공록/174
1. 서론/174
2. 섬김의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175
3. 목민 리더십의 현대적 의미/179
4. 해석과 평가/196
제7장 의사결정론 심준섭/199
1. 서론/199
2. 조선의 사법 체계/201
3. 의사결정과 결정오차에 대한 다산의 사상/204
4. 해석과 평가/220
제8장 사회복지 이념 조성한/223
1. 서론/223
2. 조선 후기의 사회복지 상황/224
3. 다산의 복지 이념/227
4. 생산적 복지의 딜레마와 다산의 교훈/241
5. 해석과 평가/245
제9장 교육관 조성한/249
1. 서론/249
2. 교육철학/250
3. 교육제도와 교육 내용/258
4. 해석과 평가/265
제10장 다산 행정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평가 최병선·심준섭/267
1. 권력 중심의 현실주의적 세계관/270
2. 애민에 기초한 법제도 인식/276
3. 철두철미한 실적주의 공직관/284
4. 과학적 합리주의/289
5. 이 글을 마치며/293
용어 정리/297
찾아보기/309

